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고슬라비아 전쟁 (문단 편집) === [[1990년]] 통나무 혁명 === 통나무 혁명(Balvan revolucija / Балван револуција)은 [[1990년]] [[9월 29일]]부터 [[10월 25일]]까지 벌어진 [[세르비아인]]들의 대 [[크로아티아]] [[분리주의]] 봉기를 말한다. 현재는 유고슬라비아 전쟁의 시작을 사실상 이 사건으로 보는 추세이다. [[1990년]] [[4월]] [[슬로베니아 사회주의 공화국]]과 [[크로아티아 사회주의 공화국]]에서 민주 선거가 치러지고 민족주의 정당이 압승하자,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에 거주하던 [[세르비아인]]들은 위기의식을 느꼈다.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내의 세르비아인들은 [[슬로베니아인]]과 [[크로아티아인]]의 차별을 피해서 [[1990년]] 중반에 [[크로아티아]] 내에서 세르비아인들이 다수를 점하고 있던 크닌스카크라이나(Kninska Krajina) 지방으로 몰려들었고, [[1990년]] [[8월]]이 되자 크로아티아 영토의 1/3에 해당하는 크닌스카크라이나(이하 크라이나) 지방에서는 세르비아인 인구 비중이 70%를 넘어서며 절대 다수를 점하게 되었다. 그러나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내의 세르비아인들은 다 합쳐 봐야 40만 명 정도로, 500만 명이 넘은 크로아티아인 전체의 8%밖에 차지하지 못했다. 게다가 크닌스카크라이나 내에도 약 10만여 명의 크로아티아인이 남아있었다. 그 상황에서 [[1990년]] [[8월]] [[프라뇨 투지만]] 크로아티아 공화국[* [[크로아티아 사회주의 공화국]]은 [[1990년]] [[6월]] 크로아티아 공화국으로 이름을 바꿔달고 [[1991년]] [[6월 25일]] 유고 연방을 탈퇴했기에 당시까지는 크로아티아가 유고 연방 소속이었다.] 대통령은 크로아티아 공화국 헌법을 제정하면서 세르비아인을 [[소수민족]]으로 규정[* 명목상이긴 했지만 유고슬라비아 전쟁 내내 [[세르비아]]는 [[크로아티아인]]과 [[슬로베니아인]], [[마케도니아인]], [[보슈냐크인]]을 소수민족으로 두지 않고 "적어도 법적으로는" 평등하게 대해주었다. 물론 현실은 '''평등하게 죽여버렸지만.''']하고 "크로아티아 정부에 충성 맹세를 하지 않을 경우 크로아티아 공화국의 [[공무원]]이 될 수 없다"고 규정하면서 세르비아인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왔다. 누가 봐도 투지만의 세르비아인 소수민족 규정은 크라이나 지방에서 다수를 점하고 있던 세르비아인을 겨냥한 조치들임이 명백해 보였다. 1990년 8월 크닌스카크라이나 지방의 중심지 크닌[* 이후 [[크로아티아]]에서 독립을 선언했던 [[크라이나-세르비아 공화국]]의 수도가 되었다.]의 시장으로 뽑힌 밀란 바비치[* 원래는 [[치과의사]]로, 크닌 옆에 있는 작은 마을 출신이다. [[1990년]] 세르비아 민주당에 입당하면서 정치인이 되었고, 이후 [[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]]의 초대 대통령([[1991년]]~[[1992년]])과 크라이나 외무장관([[1993년]]~[[1995년]]). 마지막 총리([[1995년]])를 지냈다. 이후 바비치는 크라이나 내 [[크로아티아인]]들한테 학살을 지시했다는 혐의로 유고 전범으로 [[기소]], [[재판(법률)|재판]]을 받아 13년 형을 선고받고, 항소심 와중에 독약을 마시고 자살했다.]는 크로아티아 헌법의 부당성을 역설하며 크로아티아내 세르비아인들에게 "비폭력적인 수단을 통해 [[크로아티아]]로부터 [[분리주의|떨어져나와]] 독자적인 길을 가자"고 봉기를 촉구하였다. 밀란 바비치는 크라이나 지방에 세르비아 크라이나 자치주, 즉 SAO 크라이나 성립을 선포하였다. [[프라뇨 투지만]] 크로아티아 대통령은 크라이나의 봉기를 비난하며 경찰력(군병력)을 동원해 진압할 것을 천명하였고, [[세르비아]] 대통령 [[슬로보단 밀로셰비치]]는 투지만이 세르비아인에 대한 탄압을 가할 경우 개입하겠다고 경고하였다. SAO 크라이나 형성을 위해 세르비아인들이 "비폭력적인 수단" 중 선택한 방법이 바로 [[통나무]]였다. 당시 세르비아인들은 무장이 거의 없었기에 크닌 일대에서 일단 먼저 통나무를 깔아서 크로아티아와의 [[국경선]]을 만들려고 했다. 크로아티아군(당시 크로아티아 자치경찰)이 크닌 일대에 통나무를 쌓는 세르비아인을 제지하려 하자 세르비아인들은 거세게 반발했고, [[1990년]] [[10월 1일]] 크닌에서 벌어진 세르비아인들의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, 크로아티아 경찰이 실탄을 발포하면서 통나무 혁명 사태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했다. [[세르비아]]계 방송(RTS)이나 세르비아인 [[신문]]에서는 이 사태를 대서특필하였다. [[1990년]] [[10월 4일]] [[슬로보단 밀로셰비치]]는 [[베오그라드]]를 방문한 밀란 바비치 크닌 시장을 통해 크라이나 지방의 세르비아인들에게 [[총기]]를 지급하기 시작하면서 비폭력 투쟁은 [[유혈사태]]로 번졌고, 크닌 일대에서 벌어진 유혈사태는 곧 크라이나 지방 전역으로 확산되었다. 결국 [[10월 25일]] 크로아티아 경찰이 크라이나 내에서 세르비아인 진압을 포기하면서 크로아티아-크라이나 통나무 국경선은 정말로 국경선이 되고 말았다. 이 사건을 통나무 혁명 사건이라고 한다. 크로아티아인들은 현대사 최악의 치욕이라고 느낀다고 한다. 이후 [[1991년]] [[6월 25일]] 크로아티아가 유고 연방을 탈퇴하자 통나무 혁명을 통해 사실상 분리가 되어버린 크라이나 지방은 크로아티아에서의 분리독립을 선언하였고, [[슬로보단 밀로셰비치]]의 지원을 받아 [[1991년]] [[3월]] 파크라츠 충돌이 벌어져 크라이나 지방처럼 크로아티아에서 독립을 선언한 SAO(세르비아 자치주) 서슬라보니아, SAO 동슬라보니아(부코바르 일대)와 통합, [[1991년]] [[12월]] [[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]]을 건국하게 된다. [[1995년]] [[8월 8일]]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을 크로아티아가 멸망시킬 때까지 이 일대에서 살던 [[크로아티아인]]은 [[세르비아인]]들에게 오히려 역으로 차별받거나 [[제노사이드]]를 당하고, 아예 크로아티아 본국으로 추방되기도 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